KBS 특별기획 ‘진주대첩’ (1TV, 12월28일,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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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12-29 17:02 조회2,2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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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념 역사다큐 2부작
KBS 특별기획 – 진주대첩
■방송 : 12월28일(목) 29일(금) 밤 9시40분, KBS 1TV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 큰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
1592년 1차 전투는 “진주대첩”으로 승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다음 해의 2차 전투는 아쉽게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번의 승전과 한번의 패전!
과연 진주성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년간의 치밀한 취재와 자료고증, 그리고 진주대첩을 다룬 뮤지컬과의 콜라보등 새로운 영상문법으로 승전의 조건과 패전의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위기속에 처한 “바로 지금 현실”에 맞는 대처방안을 고민하게 만드는 신개념 역사 다큐멘타리!.
이번 특집기획은 총 2부로 이루어졌다. 1부에서는 어떻게 승전할수 있었나?를 알아보고 2부는 승전한지 1년만에 왜 패전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본다.
1부 : 승전의 조건 – 통합
방송 : 12월28일(목) 밤 9시40분 KBS 1TV
-김시민의 탁월한 리더십
임진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 수성장은 진주목사 김시민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상관인 경상우병사의 입성까지 거부하면서 3천 8백의 군사와 진주성민들의 신뢰를 획득한 탁월한 리더였다. 또한 치밀한 전술로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고 마침내 자신은 순국했다.
진주대첩 승전의 한 요인, 바로 김시민의 남다른 리더십이었다.
-일본군의 분열
진주성 공격에 나섰던 일본군 장수들은 그들의 독특한 전쟁문화인 쟁공에 젖어 있었다. 장수들끼리 공을 다투는 쟁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특유의 용병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에 일본 장수들은 날마다 주장을 바꿔 진주성을 공격하면서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으며 여기에 단순한 전술을 구사,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우세한 무기체계
당시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했다. 반면 진주성에는 대형화기 총통이 있었고 이들이 조총을 압도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군의 개인 화기 활도 발사속도나 성능면에서 결코 조총에 뒤지지 않았다.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개발된 비격진천뢰등 진주성 수성군의 무기체계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일본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의병의 협력
진주대첩의 또 하나의 주역은 의병이었다. 임란 당시 가장 먼저 창의한 곽재우를 비롯 수많은 의병들이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심리전을 펼쳤던 것이다.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 여기에는 의병들의 협조, 진주성민과 조선군의 협력등 통합이 있었던 것이다.
2부 패전의 원인 – 갈등
방송 : 12월29일(금) 밤 9시40분 KBS 1TV
-달라진 일본군
진주대첩 8개월 여 후, 진주성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지난 해 패전의 보복과 명과의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따라 10만 일본군이 진주성을 에워쌌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등 일본의 맹장과 평양과 함경도까지 북상했던 최정예군이었다. 지난 해 후방 부대와는 확연히 다른 일본군이이었다.
-의병과 수성군의 분열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권율을 비롯한 관군과 곽재우등 의병장들이 의령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진주성을 지키자는 의견과 포기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다. 결국 권율등 관군은 진주성을 버렸으며 곽재우등 의병들도 진주성 구원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김천일등 소수의 의병과 관군만이 진주성 수성에 나섰고 고립된 진주성은 결국 패전의 아픔을 겪고 말았다.
-무너진 지휘체계
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경상감사 김성일이 병사하고 말았다. 최고 지휘관의 부재, 여기에 진주성에는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진주목사 서예원등 많은 지휘관이 각자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치른 전투, 패전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일본군의 신무기와 다양한 전술
철저하게 고립된 진주성 공격에 나선 일본군, 지난해와는 다른 신무기를 선보였다. 대표적인 공성무기가 바로 귀갑차였다. 여기에 지난해와는 달리 일본군은 심리전과 다양한 경로의 공격등 전술 또한 달랐다.
즉 일본군은 지난 패전에서 교훈을 찾았고 진주성 수성군은 분열로 인한 고립을 극복하지 못했다.
2차 진주성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내부의 갈등과 불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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