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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충무공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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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두었다가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임진왜란을 예견한 것인가?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조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을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등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 · 최강 · 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 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 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 되었다.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 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대처하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 · 기와 · 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 · 관 · 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군 · 관 ·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기여도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 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깔보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가지의 효과를 창출하였다.